쓰여진 예고편들

1993년
6월 부산에서 출생. 엄마가 출산 뒤에 입원하셔서 몇 주간 친할머니가 대신 봐주다. 신생아 때는 장미빌라라는 곳에서 엄마와 이모가 돌보다. 생후 1개월 때 옆집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참지 못한 엄마가 신고를 했는데, 한 노인이 고독사하여 발견되었다고 한다.

1994년
이 때가 기억나면 그게 이상한 거다.

1995년
이 때도 마찬가지다. 외할아버지가 음주 운전 사고로 돌아가시다. 외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일본으로 건너가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지진으로 공장이 무너지고 사장이 도망가 한국에 돌아왔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존자이기도 하다.

1996년
3월에 동생이 태어나다. 동생이 태어난 뒤 질투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동생의 출산을 촬영하기 위해 아빠가 비디오테이프 캠코더를 사다. 첫번째 테이프에는 갓 태어난 동생이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 뒤로 몇 년간은 아빠가 굉장히 재미있는 순간을 많이 찍어 놓았다.
친할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다. 집에 장손이 태어나서 여한이 없다고 말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1997년
이때까지도 주욱 엄마와 아빠는 따로 사셔서, 나와 동생은 보통 이모 집에서 지냈다. 이모는 식당이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이모부는 배를 탄다. 대부분의 시간에는 사촌 오빠들이 우리 남매를 돌봐 준다. 엄마가 평일 밤 늦게, 또는 주말에 이모 집에 들러 우리를 데려간다.
주말에 엄마와 함께 있을 때는 왠지 자꾸 열이 나는 것 같다. 엄마한테 열이 난다고. 머리가 아프다고 계속 보챈다. 엄마는 말한다. 아프다 아프다 징징거리면 진짜로 아프게 되니까 조용히 하라고.

1998년
아빠가 서울에서 1년 동안 일을 찾지 못한다. 엄마는 부산에 남아 계속 학원 강사로 일한다. 우리는 몇 달에 한 번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사는 아빠를 만나러 간다. 공항에서 엄마는 나와 동생에게 카레라이스를 사 먹인다.
아빠는 서울 어딘가의 좁은 단칸방에 앉아 있다. 엄마가 투피스를 입은 채 밀린 설거지를 한다. 바닥이 찐득거린다. 뛰어다니다가 실수로 아빠의 재떨이를 밟아 넘어뜨린다. 그 안의 구정물과 담배꽁초가 좁은 바닥 위로 쏟아진다. 나는 아빠에게 크게 혼난다. 아빠는 엄마에게 크게 혼난다. 엄마는 나를 안고 화장실에서 발을 씻긴다. 하지만 그 뒤에도 발톱에 낀 때는 가시지 않는다. 내 발이 유난히 크고 더러워 보인다. 어른 발이 된 것 같다. 나는 발톱의 때를 후벼 파기 시작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아빠는 부산에 우리를 만나러 오기도 했다. 어쩔 때는 웨스틴 조선 호텔이나 그랜드 호텔에 하루이틀 정도 묵으면서 나와 동생을 해변과 수영장에 데려가기도 했다. 아빠가 찍은 비디오 테이프 어디엔가에는 생일을 맞은 동생 앞에 버터케이크를 두고 생일 축하 노래를 하는 아빠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 날, 아빠와 함께 빵집에 가 버터케이크를 사 온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우리 가족은 아주 잠시 만나야만 하고 캠코더 안에서만 행복해 보이는 것 같다.

1999년
엄마가 어느 날 눈높이 수학 선생님을 이모 집에 모셔 온다. 어른 같은 발가락을 사용해 덧셈을 하는 나를 엄마와 선생님이 무섭게 쳐다 본다. 엄마가 이웃집 아이가 풀고 버린 문제집을 가져다 준다. 지우개로 지워진 부분을 베껴 쓰다가 들통나 혼난다. 내년부터 나는 이모가 아니라 엄마와 함께 산다고 한다. 서울로 이사가 아빠와 함께 살 것이라고 한다. 할머니도 아랫집에 살 것이라고 한다.
어느 날 밤 우리 가족은 엄마의 집으로 운전해 가고 있다. 붉은 불 앞에 차가 선다. 그 뒤에서 갑자기 쾅, 하고 뒷차가 우리와 충돌한다. 반쯤 자고 있던 나는 깬다. 엄마가 소리를 지른다. 경찰이 온다. 경찰이 우리 남매를 안고 집에 바래다 준다. 뒷차 운전자가 술에 취해 있었다.
그 뒤 병원에 갔는데, 한 번만 갔다 온 것이 아니라 몇 달간 통원 치료를 했다. MRI 스캔을 몇 번이나 했다. 의사 선생님이 내 뇌를 조각조각 자른 그림을 보여주며 아빠에게 설명을 한다. 아빠는 병원에 날 데려갈 때마다 오뎅을 사 준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가 갑자기 머리를 긁기 시작한다. 머릿속에 뭔가 있는 것 같다. 빼 내어야 한다. 나는 그 뒤 밥 먹을 때도, 유치원에 갈 때도, 잘 때도 두피를 긁는다. 너무 긁어서 두피에 상처가 나고 진물이 흐른다. 연말에 서울로 이사한 뒤에도 변함이 없다. 텔레비전에서는 밀레니엄 버그에 대한 뉴스가 연일 보도된다. 나는 배가 부풀고 속이 안좋다. 먹은 것도 없는데 배가 터질 것만 같다. 연말 주취 사고로 북적거리는 응급실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의사 선생님은 아무 이상이 없다 한다.

2000년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엄마는 할머니가 아래층에 살 것이라 했는데 이야기가 다르다. 할머니는 우리와 함께 산다. 할머니는 우리와 함께 밥을 먹지 않고 따로 차려 먹는다. 방 안에서 담배를 핀다. 화투로 점을 친다. 할머니는 유카타를 입고 생활한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을 점령해서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되었다고 나에게 말한다. 젊었을 때 미군들과 파티에서 긴 장갑을 끼고 춤을 추던 시절을 이야기 해 준다. 친구를 배웅할 때는 사요나라라고 말한다. 할머니의 친구는 나를 오목좌라고 부른다. 내가 오밀조밀하게 생겨서 그렇게 부른 줄 알았는데, 커서 알고 보니까 오모챠, 장난감이라는 뜻의 일본어다.
아빠가 양복을 입고 일하기 시작한다. 가끔씩 집에 늦게 들어온다. 엄마는 학원 강사 일을 관두고 집에서 과외 선생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밤 늦게까지 일한다. 엄마가 고함을 치는 날이 많아진다. 비명을 지를 때도 있다. 엄마가 비명을 지를 때는 마치 짐승이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다. 나는 귓속에 뭔가가 있는 것만 같다.
엄마가 나를 성당에 보내기 시작한다. 성가대 활동을 하다.

2001년
할머니가 안방 침대에 앉아서 화장실을 가리키고 뭐라고 하고 있다. 아빠가 서서 허리에 손을 지고 화장실 안을 쳐다 본다. 화장실 바닥에 엄마가 쓰러져 있다. 손빨래를 하다가 쓰러졌다. 밤 11시다.

2002년
어느 날 인체의 신비 전시에 억지로 끌려 갔다 왔다. 전시에 서 있던 인체 모형들은 진짜 시신을 가지고 만들었다. 관객들이 여자 모형을 함부로 만지고 젖가슴을 가리키며 웃는다. 저녁에 나는 월드컵 중계를 보지 못하고 남은 수학 숙제를 한다. 한 번은 일주일 동안 눈높이 학습지를 하나도 풀지 않았는데, 엄마가 화가 나서 내가 보는 앞에서 학습지를 죄다 찢어 버렸다. 낮에 봤던 인체 모형이 방문 너머로 날 지켜 보는 것 같다. 꿈 속에서도 피부가 없는, 붉게 빛나는 사람이 나를 쳐다 본다. 여름방학 동안에 피부가 시커멓게 타서 떨어지는 각질을 긁다가 팔에 피가 난다.

2003년
반에서 나 빼고는 이제 아무도 양갈래 땋은 머리를 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그냥 머리를 하나로 묶거나 아예 풀고 학교에 가고 싶다. 엄마가 허락하지 않는다. 아침마다 나를 앉혀 놓고 머리카락이 빠질 듯이 당겨서 머리를 땋는다. 아빠가 밤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잦다. 안방에서 엄마가 전화기에 대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새벽에 거실에 나가 보니 엄마가 쓰러져 있다. 나는 당황해서 아빠에게 전화를 하려 한다.
어느 날은 한밤중에 구급차가 집에 왔다 갔다. 할머니가 쓰러지셨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몇달간 입원해 나는 한동안 하교 뒤에 이웃 집에서 지낸다.
방과후 수업으로 컴퓨터 수업을 듣는다. 한 번은 복도에서 혼자 수업이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6학년 남학생들이 나를 에워싸고는 괴롭히며 나를 붙잡는다. 내 바지를 벗겨 속옷을 보려고 한다. 내가 울기 시작하자 웃으며 멈추고는 사라졌는데 그 뒤로 컴퓨터 수업에 가기 싫다며 엄마에게 조른다. 결국 몇 주가 지난 뒤에야 수업에 가기 싫은 이유를 사실대로 말했는데 컴퓨터 수업에 빠질 수는 없었고 내 바지를 벗긴 남학생들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았다. 그 남학생들 중 한 명과 그 학기까지 컴퓨터 수업을 같이 들었다.

2004년
엄마가 캐나다로 이민 간 자기 친구에게 나를 1년간 맡기기로 한다. 나는 캐나다에 있는 학교에 다닌다. 나는 갑자기 촌스러운 옷을 입고 역겨운 점심을 싸오는 아이가 된다. 반 학생들이 나에게 뭐라고 해도 반박하지 못한다. 엄마의 친구는 나를 싫어한다. 엄마의 친구의 아들과 딸도 나를 싫어한다. 나는 그 집에 같이 살고 있는 유학생 언니와 한 침대에서 잔다.
캐나다 아이들은 다들 자기 방이 있고 그 방 안에는 자기 텔레비전과 전화기가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는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가난하거나 백인이 아니거나 다른 나라에서 이민 온, 지루한 아이들이라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한다. 나는 내 방이 없고 내 텔레비전이나 전화기가 있는 것도 아니며 내가 좋아하는 옷을 사 입지도 않는다. 나는 여기서 임시적 이민자가 된다. 캐나다 사람들은 명절 때마다 큰 돈을 들여 커다란 집을 화려하게 꾸민다. 온 동네가 놀이공원처럼 잠든다.
우리들은 주말마다 한인 교회에 가야만 했다. 한인 교회의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수군거리는 걸 정말 잘했고 그 중에는 세 번 이혼하고 네 번 결혼했으며 각각의 결혼마다 아이를 한 명씩 낳은 한국인 여성이 종종 소문의 대상이 되었다. 그 여성의 첫째 아들은 고등학생이었는데 진실게임을 한다며 나와 유학생 여자애들을 성추행했고 그 사실을 같이 지내고 있던 엄마의 친구에게 말하자 그 사람은 나에게 “너는 분명 그걸 즐겼을 거다”고 말하고는 무시했다.

2005년
서울로 돌아온 나는 짧은 바지를 입고 손톱을 칠하고 다닌다. 엄마가 내 손톱을 역겹게 쳐다보고는 아세톤으로 빨리 지우라 한다. 할머니가 다른 곳에 이사해 혼자 사신다. 나는 내 방이 생겼다.
첫 남자친구가 생겨서 같이 영화를 보러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크게 화를 낸다. 결국 남자친구의 엄마와 함께 셋이서 영화를 보러 갔다. 이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싸우다가 한 여자아이를 때렸다. 내가 실망해서 헤어지자고 한다.
이때까지도 아빠는 가끔씩 캠코더를 꺼내 우리 가족을 찍곤 했다. 내가 캐나다에 가 있는 동안, 아빠는 겨울 해변가에 가서 혼자 종종걸음을 걸어 발자국으로 내 이름을 남기는 장면을 오랜 시간 동안 찍어 내가 한국에 돌아 왔을 때 보여 줬다. 왜 이런 걸 찍었나 부끄러워 한 기억이 남아 있다. 아빠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만 나에게 상냥했다.

2006년
중학교에 입학한다. 엄마는 내가 사귄 친구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엄마가 새벽 한 시까지도 일하기 때문에 밤 늦게까지 집에 불이 환하다. 텔레비전과 설거지 소리,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소리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음악을 들으며 소리를 무시하려고 해 본다. 외할머니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시다. 숙제를 하지 않은 나를 앉히고 엄마가 너같은 애랑 너희 할머니 돌볼 시간에 자기 어머니를 돌봤어야 한다고 말하며 운다.
외할머니는 평생 농사를 지으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외할머니가 글을 읽을 줄은 아셨는지도 의문이다.

2007년
같은 밴드부 동아리에서 드럼을 치는 한 학년 선배와 사귀기 시작한다. 등교할 때마다 우리 집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손을 잡고 같이 간다. 그 남자친구가 어떤 성깔 있는 선생에게 벌을 받다가 책을 집어던졌다고 한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헤어지기로 한다. 선배의 명찰을 돌려주는데 그 실망한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서울의 한 대학 영재원에 합격해 일주일에 한 번 강의를 듣는다. 아빠는 그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가 지구과학부 소속이기 때문이다. 아빠가 추석에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빈다. 우리 딸이 천문 공부 안 하게 해주세요. 엄마는 내 방에 들어와 나에게서 짐승이 발정 난 냄새가 난다고 한다.
엄마와 아빠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아진다. 부엌에서 엄마가 나를 보고 욕을 한다. 지 애비 닮아서 이기적이야. 밥상 앞에서 아빠가 나를 보고 욕을 한다. 말 안 듣고 말대답하는 건 지 엄마랑 똑같아요. 허파에 바람만 가득 찬 년. 논다니 년. 배가 불러 똥을 싸는 년. 나는 내 방문을 닫을 수 없기 때문에 대신 화장실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는다. 눈썹칼과 커터칼로 팔과 다리를 벤다. 얼굴도 벤다. 그 뒤로는 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욕하지 않는다. 한여름에 외출할 때 가디건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엄마가 나를 붙잡는다.
같은 학원을 다니는 친구와 잠시 사귄다.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 갔다가 이 친구가 내 명찰을 돌려 줬다. 아마 내가 엄청 실망한 얼굴이었던 것 같다.
이 때 즈음에 세상에 신은 없다는 결론을 혼자 내린다. 대신에 신문을 따로 사서 읽고 집회에 자주 나가기 시작하고 그럴 때마다 엄마한테 무지하게 혼난다.

2008년
아빠의 음주 운전과 과속 경고문이 몇 번이나 집에 우편으로 도착한다. 안방 문을 닫고 엄마와 아빠가 자주 싸운다. 엄마가 아빠에게 도대체 어떤 년이냐고 소리를 지른다. 아빠는 자기 핸드폰을 절대 만지지 말라고 한다. 아빠의 핸드폰 수신메시지함에는 항상 이상한 전화번호로부터 연락이 와 있다. 이 때는 핸드폰에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었다. 아빠의 핸드폰 비디오 갤러리에는 어떤 동영상이 있다. 한 젊은 여자가 옷을 벗은 채 웃고 있다. 아빠가 여자에게 뭔가를 한다.
엄마가 부엌에 앉아 나에게 중얼거린다. 너희 아빠가 자면서 욕을 하고 내 목을 조른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직도 잘 모른다. 그 뒤로 일 년에 한 번씩은 웬 남자가 내 목을 조르는 꿈을 꾼다.
나는 기숙사가 있는 특목고에 가고 싶어서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한다. 하루 네 시간 정도 밖에 못 잔다.

2009년
전원 기숙사형 특목고에 입학한다.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다. 하루 일과는 아침 7시 반에 0교시로 시작해서 밤 11시 반 야간자율학습으로 끝난다. 이 학교는 학생들을 상대로 반공 강의를 한다. 일 년 동안 같은 반 동급생, 학원 친구, 그리고 같은 동아리 선배에게서 사귀자는 고백을 받지만 다 거절한다. 소문 나기 쉬운 기숙사에서 남자친구를 만들 자신이 안 든다. 동급생들 중에 나를 아주 싫어하는 학생이 있다. 그 학생과 몇 번 싸우고 화해하지만 결국 나를 무시한다.
인터넷으로 즐겨 읽던 음악비평가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비평가가 자기 전화번호를 알려 준다. 기숙사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계속 문자를 한다. 비평가는 내가 귀엽다고 한다. 밴드 공연을 보고 싶으면 자기가 공짜로 보여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주말에 집에 가면 외출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수학 과외를 받는다. 눈치를 봐서 몰래 번화가에 놀러가려고 한다. 몇 시간이라도 밖에 나갔다 오면 집에 난리가 난다. 엄마의 비명 소리가 예전보다 훨씬 크다. “너희 아빠가 다니는 회사가 도산했다. 이제 아빠는 무직이다.”
어느 일요일 밤 나는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기 싫어 화장실 문을 닫고 울면서 컵에 물을 받는다. 샴푸와 면도세제, 바디워시를 물에 넣어 섞는다. 이걸 마시고 아프면 학교에 안 가도 되겠지. 그걸 다 마시지만 결국 학교 기숙사에 가서 밤새 구역질을 한다. 나는 깨닫는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꿈은 집구석에서 빨리 나가는 것이었지. 하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빨리 도망가자.

2010년
봄이 되고 새학기가 시작하자 나는 곧바로 가출한다. 비평가에게 연락해 그의 집에서 며칠 묵는다. 돈이 금새 떨어져서 중학교 동창 친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연락한다. 친구는 그러지 말고 어머니랑 얘기를 해보자고, 자기가 지켜주겠다고 나를 설득한다.
엄마가 나를 다른 학교로 전학보내려고 하지만 상담 간 다른 학교에서도 내가 깽판을 치고 사라진다. 결국 자퇴를 한다. 오전에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오고 오후에는 취미 화실에 다닌다. 제일 좋아하는 시인으로는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정한다. 엄마는 내가 화실에 다니는 걸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아달라고 한다. 인권 활동을 하는 청소년 활동가들과 만난다. 같이 서명 운동을 하러 다니고 집회 현장에 간다. 나는 미술 작가가 되고 싶다. 아빠는 나를 죽이고 싶어 한다.

2011년
또 가출한다. 이번에는 청소년 쉼터에서 잠시 지낸다. 한국 사회당에 입당한다. 서울 곳곳에 재개발 반대 집회가 열리고 점거 현장에서 밴드들이 밤새 공연을 한다. 거기에서 사귄 친구 중 한 명이 트위터에 김정일에 대한 농담을 썼다가 수감된다. 이런 곳에는 꼭 나에게 친한 척을 하다가 성추행을 하는 나이 많은 남자들이 있다. 부모한테 잡혀 집으로 돌아간다.
또 또 가출한다. 이번에는 부산까지 간다.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의 목소리를 길가에 서서 듣는다. 여름에 가출했을 때는 제주도까지 배를 타고 간다. 여기에도 나에게 친한 척을 하다가 성추행을 하는 나이 많은 남자가 있다. 나를 차에 태우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 억지로 만지려고 한다. 아빠가 내 친구 아버지를 만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 인간 혀를 뽑아 죽여 버리고 싶다고 한다.
18살 생일에 서울대에 있는 법인화 반대 집회를 갔다가, 명동에 있는 재개발 반대 현장으로 간다. 친구들이 케이크를 사서 깜짝 생일 파티를 해 준다. 그러고는 그 날 새벽에 용역 깡패들이 들어와 유리를 다 부수고 간다.
집으로 돌아가니 아빠가 너는 이제 어른이니 어디 가서 우리 집 딸이라고 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기왕 여행 다닐 거면 유럽으로 여행을 가보라고 한다. 나는 여름 두 달 동안 유럽에 갔다 온다. 런던에서 걷다가,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결국 나중엔 히치하이킹을 해서 이스탄불까지 간다. 나를 차에 태우고 상냥하게 대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 억지로 만지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스탄불에서는 인천으로 돌아가는 여객기를 탈 수 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변함 없이 데모 현장에 다니면서 틈틈히 그림을 그린다.

2012년
서울에 있는 국립 예술학교에 입학한다. 학교 동아리 건물에 무단으로 개조한 공연장이 있다. 나보다 열두 살이 많은, 모히칸 머리를 한 남자와 사귀기 시작한다. 몸에 타투가 서른 개는 넘게 있다. 남자친구가 콘돔을 쓰지 않아서 나는 피임약을 먹다가 엄마한테 들킨다. 엄마가 나에게 너 몸 팔고 다니냐며, 집 나가라고 비명을 지른다. 또 가출한다.
이번에는 가출해서 갈 데가 있다. 학교 동아리방에 가면 된다. 더 이상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 학식을 먹고 강의실에서 동기들과 잠을 자고 학교 선배한테 옷을 얻어 입는다. 친구가 서울 광장에 텐트를 쳤으니 거기서 살아도 된다고 불러서 텐트를 치고 산다. 여름에는 모히칸 머리를 한 남자와 헤어지고 여름에는 팔당 재개발 지역에 가서 벌판에 텐트를 치고 지낸다. 사회당이 진보신당에 흡수되고 나는 탈당한다.
가을에는 학교로 돌아온다. 팔당에서 같이 지내던 한 남자가 정신병원에서 나에게 전화를 한다. 일 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내가 좋아하던 남자다. 나보다 열 다섯 살이 많은 남자인데, 벨 앤 세바스찬의 팬이고 오래 전부터 양극성 장애와 조현병을 앓고 있다. 퇴원하면 다시 연락하기로 한다. 진짜로 퇴원하고 우리는 계속 만난다. 그 남자는 나에게 말한다. 너 나이 때 스트레스 받지 않게 조심해. 많이 아프기 전에.
친구 둘과 밴드를 시작한다. 드럼을 치는 친구는 말을 더듬는 증세가 있다. 그 학기에는 학교 생활에 성실하지 않아서 학사 경고를 맞는다. 아르바이트로 200만원을 모은다. 그 200만원으로 오사카에 가서 히치하이킹으로 홋카이도까지 간다.
이 해에는 주거 공간에 실제로 들어가 잠을 잔 날이 총 일주일도 안 된다. 대부분 학교 동아리방이나 강의실, 작업실, 지하실, 텐트 등에서 잤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2013년
학교 작업실에서 생활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밴드 공연을 한다.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잠이 든다. 조현병을 앓는 남자친구에게서 연락이 끊겼다 다시 왔다 한다. 결국에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공연을 하며 알게 된 다른 남자와 사귄다. 한국에 영어 강사 일을 하러 온 캐나다인이다. 가을에는 휴학을 하고 풀타임으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집을 얻을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주말에는 남자친구네 집에 가서 하루 종일 잠만 잔다. 반 년 동안 일하고 200만원을 모았다. 부동산에서 알아봤지만 그 보증금으로는 웬만해서는 집을 얻을 수가 없었다. 보증금이라도 도와달라고 엄마에게 부탁해 보지만 할머니와 동생 신경쓰느라 그럴 여력이 없다고 한다.

2014년
복학하고 계속 학교 작업실에서 살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밴드 공연을 한다. 머리를 탈색한다. 남아시아로 여행간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80만원을 가지고 태국에 간다. 태국에서 남자친구는 말한다. 내가 너를 데리고 캐나다로 가면 너는 거기서 나를 버리고 도망갈 거잖아? 넌 그러고도 남을 애니까. 나는 한국으로 돌아간다. 탈색한 머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계속 염색하고, 탈색하고, 또 염색한다. 머리카락이 녹아내릴 때까지. 머리카락 색깔 빼고는 아무것도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다.
학교 작업실에서 밤마다 발이 시려서 잠들지 못하고 누워서 속으로 묻는다. 나는 여기에 어떻게 왔지? 나는 왜 여기에 있지? 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지?

2015년
남자친구가 한국에 돌아온다. 내가 아프다고 하는데 멈추지 않고 섹스를 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망간다. 봄에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본다. 정해진 주거지가 없으니 아르바이트 구하는 게 쉽지 않다. 같이 밴드를 하던 친구가 말더듬 증상이 많이 완화된 것 같다. 건강해지자 군대에 징집되어 밴드는 그만 두게 된다.
여름에는 일본 워홀을 간 친구를 만나러 오사카에 간다. 술을 진탕 마시고 놀다가 친구가 나를 붙잡고 울며 이야기한다. 너도 일본에 일하러 와. 일본 좋아.
가을에 복학을 하고 계속 학교에서 지낸다. 내년에 다시 휴학을 하고 일본에 워홀을 가서 돈을 벌기로 계획한다. 틈틈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은다.
어느 주말에 엄마와 아빠를 만나러 갔다가 같이 외식을 한다. 삼겹살을 먹는다. 갑자기 아빠가 엄마에게 고함을 지른다.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 본다. 내가 아빠를 보고 말한다. 아빠, 엄마가 당신 신하야? 아빠는 나를 죽여버릴 것처럼 쳐다본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나에게 돈을 쥐어 주고 나가서 아이스크림 사 먹고 집에 가라고 한다.
다음 날 아침, 뱃속이 이상하다. 돌덩이 같은 괴물이 내장 안을 후벼 파는 것 같다. 그 뒤로 매일 오전 열한 시만 되면 속이 메스껍고 아무것도 입에 넘기지 못한다. 설사나 구역질을 한다. 입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구토를 하면 먹은 게 없어 공기밖에 나오지 않는다. 외출하면 증세가 더 심해진다. 좁은 실내에 들어가면 상태가 최악에 다다른다. 영화관에 가지 못하고, 나중에는 지하철이나 버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못한다. 종합 검진을 받아 봐도 원인을 알 수 없어서, 결국 우울증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다.

2016년
일본 워홀 비자를 받아 도쿄에 온다. 비행기 안에서, 전철 안에서 속이 안 좋아서 구역질을 한다. 코엔지에 방을 구한다. 월 5만엔의 쉐어하우스다.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방을 빌렸다. 이자카야 설거지, 야키니쿠 식당, 서점, 게스트하우스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한 프랜차이즈 외국어 학원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한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한국 문화가 좋아서, 혹은 한국인 남자친구가 있어서 한국어를 배운다. 블랙핑크가 좋아요. 세븐틴을 좋아해요. 송혜교는 예뻐요. 한국 음식은 맛있어요. 내년엔 한국 여행을 갈 거예요. 한국에 가서 아이돌이 되고 싶어요. 지난 주말에는 집안 행사가 있어서 바빴어요. 아들이 말을 안 들어요. 남편하고 싸웠어요. 나는 아픈 배를 부여잡고 수업 준비를 한다.
히토미 씨, 지난 주말에는 뭘 했어요? 남자친구랑 쿠치켄카를 했어요. 말다툼. 왜요? 지금 백화점에서 일해요. 퇴직하고 서울에 가고 싶어요. 한국어 배우러 가고 싶어요. 남자친구가 반대해요. 히토미 씨의 남자친구는 한국인이다. 히토미 씨, 서울 가세요. 제가 응원해요. 히토미 씨는 진짜로 퇴직하고 서울에 단기 어학연수를 갔다.
여름에 친구 소개로 한 밴드를 만난다. 다들 친한 친구가 된다. 그 중에 베이스를 치는 남자애가 마음에 든다. 아키타 출신에, 눈이 정말 예쁘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친구다. 하지만 따로 연락하지는 않는다. 집이 엄청 더러운 걸로 유명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도쿄에서 평범한 직업을 가지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다.
대신에 술집에서 만난 다른 남자와 사귀기 시작한다. 나보다 열 다섯 살이 많고 도쿄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는 사람이다. 아키타 출신에, 눈이 정말 예쁘지만 책은 안 읽는다. 가끔씩 그 사람 집 거실에 앉아서 나는 막 운다. 우울증 약을 장기 복용하니 호르몬에 이상이 생겨서 피 검사를 했다.

2017년
도쿄에 있는 예술대학에 교환학생 등록을 해서 공부하기 시작한다. 학교 캠퍼스는 좋지만 뭔가가 다르다. 서울에 있는 모교에 가고 싶다.
한 학기 동안 공부를 하고 서울에 돌아가야 하는데 나는 서울에 돌아갈 수 없다. 집에 갈 수 없다. 집과 내가 자란 동네 생각을 하면 다시 배가 아프다. 여기서 반 년 동안 어학교를 다니면서 취직 활동을 하기로 한다. 취직처를 정해 놓고 서울에 돌아가려고 한다. 오전에는 어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한 스타트업에서 일을 한다. 주말에는 취업 박람회에 간다. 친구도 만날 수 없고 쉴 수도 없다. 반 년 동안 생리가 끊긴다. 남자친구와는 너무 바빠서 연락이 끊긴다. 한 방송국에서 인턴십을 하기도 한다. 밤 늦게까지 방송국에 남는다.
오랜만에 사귀던 남자친구와 만난다.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같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다. 말다툼을 한다. 나는 서울에 있는 예술학교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서 졸업을 잘 할 거야. 남자친구는 취해서 말한다. 너는 돌아갈 수 없어. 시끄러워. 무슨 소리야. 너네 집에 돌아가. 나를 밀치고 발로 찬다.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만 같다.

2018년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서울에 돌아가기로 한다. 오랜만에 친구들에게 연락을 한다. 출국하기 전, 베이스를 치던 친구의 방에 놀러 간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쓰레기가 쌓여 있다. 화장실엔 맥주 캔 수백 개가 산을 이룬다. 담배꽁초와 빈 페트병이 셀 수 없다. 쓰레기를 파 내어 바닥을 보니 골판지가 퇴적되어 있다. 골판지에는 시가 적혀 있다.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 안다. 친구가 혼자서 쓰레기를 치울 수 있도록 매일 쓰레기를 치우는 질문지 일기를 써서 건네 준다.
서울에 도착해서 오랜만에 할머니를 뵈었는데 체중이 급격하게 줄고 헛소리만 해 대셨다. 아빠는 청력을 잃어가고 있어 보청기를 항상 차고 다닌다. 엄마는 시력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학교를 복학한다. 같이 작업실을 쓰던 선배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무보증금에 월 30만원, 엄청 좋은 집이고 같이 사는 선배도 좋은 사람이다. 선배가 보증금을 다 걸어 놔서 나는 보증금 없이도 살 수 있었다. 쓰레기방에 살고 있는 친구와 계속해서 연락을 한다. 생각해 보니 이 친구는 알콜 중독이다. 하지만 내 전 남자 친구도 알콜 중독이었다. 우리 아빠도 알콜 중독이었던 것 같다. 나도 일본에서 알콜 중독이 되었다. 교내 심리상담을 시작한다.
서울에서도 이 친구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건다. 그리고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다. 친구의 고향, 친구의 친구의 가족, 친구의 어린 누나. 나는 이 친구를 만나러 다시 도쿄에 간다. 친구는 내가 써 준 질문지를 보고 집을 열심히 치운다. 완전히 치우는 데 삼 개월 정도가 걸린다. 친구가 불편해 하는데도 집을 치우는 장면을 촬영한다. 내가 졸업하면 우리는 결혼해서 같이 살기로 약속한다.
나는 비슷한 꿈을 계속 꾼다. 내가 그 쓰레기방에 친구와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우리는 서로의 심장을 손에 쥐고 있다. 심장이 붉게 빛난다. 그 쓰레기방이 무너진다.
촬영한 푸티지로 졸업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골든 위크>다. 골든 위크 기간에 촬영했기 때문이다. 연말에 나는 남자친구가 된 이 친구와 전화로 말다툼을 한다. 도대체 그런 다큐멘터리는 왜 만드는 거야? 기분 나빠. 교수님이 나에게 말한다. 주연아, 인생을 길게 보고 대학원에 진학해라.
일 년 내내 호흡 곤란과 이명 때문에 고생을 한다. 의사 선생님, 긴장하면 귓속에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요. 귓속에 뭐가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 제 귓속 좀 봐주세요. 항상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2019년
학교를 졸업하고 한 시립미술관에 학예과 코디네이터로 취직한다. 일은 좋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특히 좋다. 가끔씩 힘들 때도 있지만 급료도 나쁘지 않고 배울 점도 많다. 그걸로 카드빚을 갚고 침대프레임을 사고 후속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도쿄에 다녀 온다. 도쿄에 갈 때마다 도쿄에서 멀어지는 느낌이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예술가 커플이 동반 자살을 한다. 장례식은 치르지 않고 영안실에 사람들이 서 있다.
꾸준히 대학원 지원을 한다. 그 중 영국에 있는 한 대학원에 합격한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에게 연락할 수 없다. 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감이 안 선다. 결혼해서 도쿄에 살러 가기로 했는데 그것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엄마가 눈이 많이 안 좋다고 한다.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결국 영국에 가지 않는다.
대신에 겨울에 휴가를 잠시 내서 일주일 간 유럽에 갔다 온다. 지구 반대편에 오니 진짜 혼자가 된 것 같다. 마음을 고쳐 먹고 다시 대학원 지원을 하기 시작한다. 심리상담을 받아보려 하지만, 비용이 너무 비싸 포기한다.
미술관에서 일하며 점심 시간에는 시를 쓰고 저녁에는 사무실에 남아 다큐멘터리를 편집한다. <윗치 완더 휘슬>을 완성하니 이제는 다시 도쿄에 가지 못 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유행병이 돌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도 첫 확진자가 나온다. 일본과 한국의 비행편이 전부 결항된다. 한 달 뒤면, 몇 달 뒤면 다시 입국이 가능해지겠지. 일본의 대학원에 입학해 놓고도 일본 입국이 미뤄지고 있다는 학생도 있다. 일본인 남자친구와 만나기 위해 서류상 결혼을 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건너건너 듣는다. 나는 몇 군데의 대학원에 합격한다.
미술관이 문을 닫아 잠시 모든 업무가 중지된다. 나는 퇴직하고 그 시립미술관의 한 전시에 단기 프리랜서로 일한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 44만원짜리 원룸으로 이사를 한다. 작은 작업실을 구한다.
할머니가 양로원에 입소하신지 몇 달 만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신다. 할머니가 처음 쓰러지신지 17년 만이다. 할머니는 유별난 성격 때문에 소문난 기피환자셨다. 도우미 아주머니나 동료 환자에게 욕을 퍼붓고 괴롭혔기 때문이다. 사후에 확인해 보니 할머니의 처방 기록에는 치매 증상 완화제가 있다. 공동묘지에 할머니를 묻는데, 묘지기가 우리 아빠더러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냐고 화를 낸다. 나는 묘지기를 죽일 듯이 쳐다본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결혼해 아빠를 낳고 일 년 만에 이혼했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자식도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용산 미군 기지 근처에서 태어나 아빠의 조부모님 손에 컸다. 예전에 할머니는 미군 기지에서 흘러나오는 과자와 사탕을 파는 가게를 남대문 시장에 차린 적이 있다고 한다. 아빠가 대학생 때 할머니는 캐나다인과 결혼해 잠시 캐나다로 사라진 적이 있다. 몇 년 뒤에 이혼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는 돌아가실 때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우리 가족과 함께 지냈다.
우리는 할머니가 사시던 집을 팔기로 한다. 할머니가 우리 몰래 적금이며 현금도 남겨 놓았다. 그 돈이면 나는 런던에 가서 무사히 유학 생활을 할 수 있다. 일본에 남아 있는 남자친구에게 묻는다. 나랑 결혼하고 같이 런던에 가자. 도쿄도 서울도 아닌 곳에 가자. 나는 대학원에 다니고 너는 일을 하는 거야. 내가 학위를 따면 너를 보살펴 줄 테니 너도 학위를 따. 남자친구는 거절한다. 그러지 말고 도쿄나 서울로 다시 오라고. 나는 혼자서 런던에 간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봉쇄된 도시에서 집을 구하고 온라인 강의를 듣는다. 온라인으로 영화제나 전시에 참가한다. 온라인으로 교내 심리상담을 한다. 이 해에는 단편 영화를 두 편 찍었다. <흰담비들>과 <등 뒤로 맞대고>를 동시에 찍었다.

2021년
논문을 다 쓴다. 여름이 되어 거의 일 년 만에 영화관에 다시 간다. <노매드랜드>를 본다. 런던에서 친구를 사귀고 이사를 하고 생일파티를 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미술관에 가고 공원에 가서 개가 예쁘다고 칭찬을 한다. 가끔씩 동반 자살한 예술가 커플을 기억한다. 바에서 일하다가 동네 영화관에 다시 취직해 일주일에 두 번 일한다.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다.
엄마는 1993년에 만 28살이 되어서 나를 낳았다. 나는 이 해에 28번째 생일을 맞았다.
도쿄에 있는 남자친구를 못 본지 거의 2년이 다 되어간다. 남자친구는 오키나와에 발령받아 일을 하러 가게 되었다고 한다. 점점 내 연락을 받지 않는다. 크게 싸운다. 이젠 다 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남자를 잠시 만난다. 상냥한 사람이다. 한 번은 그 남자가 내 목을 조르는 꿈을 꾸다가 깬다. 그 사람이 그만 만나자고 해서 화가 많이 났다가, 곧바로 괜찮아진다.
나는 런던에서 진짜로 혼자 있다. 이제 우울증 약을 처방 받지 않는다. 더 이상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머리와 배가 아프지 않다. 호흡 곤란도 없다. 외이도염 증상도 없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이 해에는 영화나 다큐멘터리가 하나도 완성되지 않았다. 많이 아쉽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내가 머릿속에서 다 꾸며낸 일인지 생각해본다. 그런 의심이 들 때는 시를 쓴다. 그리고 그게 전부 다 사실이라는 걸 받아들인다.

2022년
나는 28살 반이지만 한국 나이로 이제 서른이다. 부모님의 건강이 여기서 더 이상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씩 엄마에게 문자를 한다. 아빠나 동생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자란 동네가 그렇게 싫지는 않지만 아직도 웬만하면 서울 집에는 안 가고 싶다. 일본에 남은 남자친구와는 연락을 계속 주고받기로 한다. 캐나다인 남자친구는 캐나다에 돌아가 소방관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벨 앤 세바스찬을 자주 듣게 되었다.
지금은 런던 남쪽에 다른 친구들 셋과 함께 산다. 주말에는 친구와 자주 만나기로 한다.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날까봐 매일 샤워를 한다. 요새 읽고 있는 책은 엘리자베스 하드윅의 <잠들 수 없는 밤들>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BFI나 프린스 찰스 시네마에 간다. 거의 혼자 간다.
미래에 결혼은 아마 하지 않을 것이고 아이는 절대 낳지 않을 것이다. 가끔씩 허리가 아프다. 요새는 잠에 잘 들기 위해 집중하면서 잠이 든다.

(2022)


이주연은 사회적 고립, 국경을 넘는 친밀감, 노동 불안정, 기술 발전, 산업 독성학과 몸 정치학 등을 포괄한 광범위한 리서치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분석적이면서도 시적인 논픽션 무빙 이미지를 연출한다.

Jooyeon Lee works with analytical yet poetic non-fiction moving image with expansive research and interviews to capture urban alienation, intimacy across borders, labour precarity, technological progress, industrial toxicology and body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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