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랭귀지

하얗고 교양 있는 말만 배우기로 약속해 하얗고 교양 있는 나라에 가서 주눅 들면 안 되잖아.

지하철 역 개찰구에서 직원이 옆 사람과 함께 너를 깔보는 말을 지껄일 때 한 마디도 받아치지 못했지 뒷구르기보다 쉽다 코스모폴리탄이 되는 법 공손하고 유머 감각이 있는 그렇게 되기로 약속해 저들이 네 말을 못 알아듣는 건 당연해. 네 말에 눈곱이 잔뜩 끼어 있잖아 촌스럽게.

하얗고 교양 있는 말만

개금동의 비포장 도로 학교 뒷문에 쌓여 있던 고물 변기의 무덤 엄마한테 머리채를 잡히고 집을 나갔던 일 오산역 수원역 서울역을 청량리역을 가로지르는 1호선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신발들 도장처럼 찍힌 코피 자국. 그런 건 말하지 않기로 해 정신 사납게.

하얀 공원에 가고 하얗고 윤기 흐르는 개들을 칭찬하고
하얀 커피를 마시며 하얀 눈웃음을 치기로 해

장례식 없던 을지로 어느 병원 지하 영안실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해 그렇게 열심히 하얀 말을 배웠는데. 뭐 하는 거야. 교양 있게 하얀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해 봐 화이트 아메리카노 플리즈 약속해 오늘도 하얀 눈가림을 하기로

(2021)


이주연은 사회적 고립, 국경을 넘는 친밀감, 노동 불안정, 기술 발전, 산업 독성학과 몸 정치학 등을 포괄한 광범위한 리서치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분석적이면서도 시적인 논픽션 무빙 이미지를 연출한다.

Jooyeon Lee works with analytical yet poetic non-fiction moving image with expansive research and interviews to capture urban alienation, intimacy across borders, labour precarity, technological progress, industrial toxicology and body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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