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먼저 텐트에서 매일 같이 지냈던 J, 너는 나한테 소설책 값을 아직도 안 물어 줬다.

너가 대학 도서관에서 연체해서 책을 더 이상 못 빌린다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하나 대신 빌려 달라고 나한테 부탁했었다. 그래서 내가 우리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을 하나 빌려 줬다. 그런데 너가 그 책을 그대로 잃어 버린 거 기억하냐? 텐트 안에 뒀는데 사라졌다고 했지. 그래도 나는 화도 안 내고 책값만 돌려 달라고 했다. 그런데 너는 책값 달라고 하자마자 그대로 사라졌다. 나는 돈도 없는데 교보문고까지 걸어가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내 돈으로 사 학교 도서관에 갔다 줬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같이 지낼 때 너가 나한테 화를 크게 낸 적이 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네 스마트폰 비밀번호를 풀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은데. 화를 냈다기보다는 나한테 좀 겁을 먹었던 것 같다. 사실은 네 스마트폰 액정에 손때로 비밀번호 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걸 보고 비밀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너를 좀 골려 보고 싶어서 그랬다. 이상한 초능력이나 음모 같은 게 아니었다는 걸 지금이라도 알아 줬으면 좋겠다. 당시에 나는 너를 좀 미워했는데 왜냐하면 너가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또 네가 성균관대인가 성공회대를 다녔었는데 그 대학교 남학생들을 싫어해서 그런 것도 있었다. 그건 진짜 미안하다.

또 미안한 사람, 같은 강의 들었던 복학생 H, 우리 강의 단짝이었던 것 기억하냐? 내가 자꾸 미운 소리 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솔직히 너한테도 문제가 있다. 스물여섯이나 먹어서 강의 시간에 아버지 이야기나 하는 게 말이 되나? 너네 아버지가 너를 굶겼냐 아니면 집을 나가라고 했냐? 너 건축과 가는 것 다 지원해주고 잘 지냈던 거 아니냐? 그런데 생각해 보면 너도 나처럼 엄청 낡은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또 내가 스물여섯이나 되어서 복학을 해 보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미웠다. 그래서 너가 강의 시간마다 과제 이야기는 안 하고 아버지가 밉다는 이야기만 했던 걸 이해한다.

내가 시청 광장에서 지낸다고 해서 너도 깜짝 놀랐을 것 같다. 너가 집에 돌아가는 길이랑, 내가 시청 광장에 돌아가는 길이랑 같아서, 매일 신이문 역에서 이야기 했었는데 기억하냐? 내가 너에게 당신 생각에는 서울 시청이 어떤 것 같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지. 서울 시청도 그렇고 동대문디자인파크도 그렇고 청계천도 그렇고 당시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모양새라고 다들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또 나름대로의 살벌함이 있는 것 같고 어떤 때는 굉장히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당시에 너는 아무 대답을 안 했는데 2020년이 되어서 보는 서울 시청은 어떠한지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졸업 학년이던 선배 M, 내가 한 번은 신이문역 근처에서 전화해서 나를 좀 데리러 와 줄 수 있냐고 부탁했었다.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는데 무서우니까 데려와 달라고 했었다. 시청역에서부터 웬 외국인이 계속 말을 걸면서 따라왔는데 같이 신이문역에서 내릴까봐 정말 무서웠다. 그런데 M 너는 곧바로 나를 데리러 와 줬다. 많이 챙겨 줘서 정말 고마웠다. 내가 입을 옷이 없어서 네가 옷을 나눠 준 적도 있는 것 같다. 사이즈가 안 맞았다. 1학기가 끝날 시점이 되자 네 얼굴에 여드름이 정말 많이 올라와서 깜짝 놀랐는데, 시간이 많이 흘러 내가 졸업할 때가 되니까 똑같이 여드름이 정말 많이 올라왔다. 그래서 네가 그 시기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제서야 알았다. 너는 졸업하자마자 지방으로 내려가서, 취직하고, 결혼도 했는데 그때는 그게 아깝다고 함부로 생각했다. 지금은 함부로 누군가의 선택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내가 텐트에서 지낸다고 보러 와 줬던 대학 강사 W, 당시에는 헛소리만 하고 과제도 안 해 가서 죄송했습니다. 졸업 뒤에 계획이 딱히 없다고 제가 이야기했었는데 저는 졸업 뒤에 돈도 모으고 자취도 하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능교육 농성장의 이름 모르는 아저씨가 자주 우리 텐트를 보러 오셨는데 제 과제를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패턴 만들기 과제는 씨 플러스를 받았습니다.

시청 광장에 제일 먼저 텐트를 쳤던 S, 나는 너한테 일말의 고마움도 없고 또 딱히 분노도 없다. 그래도 너가 나한테 텐트를 하나 빌려 줘서 대학 신입생 1학기 동안 눈 붙이고 잘 곳이 있었다. 텐트에서 자면 잠을 설칠 줄 알았는데, 당시에는 밤 11시가 되면 딱 잠이 들고 아침 8시가 되면 딱 일어났다. 밤에는 추워서 자고 아침에는 텐트 안이 더워져서 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만큼 규칙적으로 잘 잔 시기도 없던 것 같다. 우리 텐트 안에 매일 맥도날드 포장지가 굴러다니던 것 기억하냐? 너랑 J랑, 다른 사람들이 사 왔던 거지? 아무리 그래도 텐트 치고 데모하는 곳에서 맥도날드 포장해 먹는 게 말이 되냐? 아직도 데모하고 다니면 함부로 맥도날드 시켜 먹지 마라.

지금 생각해 보면 너는 성격에 조금 결함이 있다. 결함이 있다기보다는 논쟁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그 성격을 살려서 사회의 한 일원으로 취직도 하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솔직히 말하건대 너는 지금까지도 그때랑 비슷하게 살고 있을 것 같다. 당시에는 텐트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면 프레지던트 재능 경동대학교 같은 간판이 보이고 양 옆으로 환구단 아래 그리고 대한문 옆에 농성장이 하나씩 있고, 옛날 서울 시청이 새로 짓는 서울 시청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2020년이 되어서 보니 농성장들만 사라지고 나머지는 다 남아 있다. 직장 사무실 너머로 파도의 끝부분이 보일 때마다 마음이 이상하다. 그래도 텐트가 있던 자리에 겨울마다 아이스링크장이 생기니까 시민들 입장에서는 그게 더 좋을 듯 싶다. 네 생각에도 아마 그럴 것 같다.

텐트에서 매일 같이 지냈던 J, 그 텐트에 알코올 의존증인 홈리스 아저씨가 자주 와서 자고 갔는데 기억하냐? 제가 원래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에요 새벽마다 일 찾으러 나갑니다. 사업을 했었는데 다시 일으킬 겁니다 제가. 저는 집도 멀쩡히 있어요 아내랑 딸이 살죠 둘한테 폐 끼치기 싫어서 지금은 나와 살지만 사업을 다시 일으킬 겁니다 두고 보세요 제가. 이래 보여도 못 하는 게 없습니다 제가. 그 아저씨가 매일 그렇게 우리한테 주장했던 것 기억하냐? 텐트가 새로 짓는 서울 시청 공사장 바로 옆에 있었는데, 간이 화장실 지린내가 엄청나던 것도 기억하냐? 수시로 경찰이 와서 우리 텐트들을 몰래 보고 가고는 했는데 그것도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르포도 잘 쓰는 작가고 너는 돈이 없어서 책값을 못 줬을 거라는 걸 이해한다. 또 그 텐트에서는 책뿐만 아니라 생수도 없어지고, 누군가의 노트북도 없어지고, 옷도 없어지고, 여러가지가 많이 없어졌으니까 책이 없어진 건 너만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가끔씩 너는 말이 없어지기도 하고 또 울먹거리기도 했었는데, 너만의 고민이 있었으리라고 지금 와서 이해한다.

원래 이 글은 강사 W의 수업을 억지로 듣는 복학생 H의 눈으로 서술하고 나와 선배 M이 얽혀 싸우는, 그걸 텐트에서 같이 사는 친구 J가 말리려고 애쓰는, 그러다가 또 S가 복학생에게 시비를 거는, 서울 시청 광장을 배경으로 한 소설로 쓰려고 했다. 그런데 소설을 쓰기에는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이 다들 너무 약하고 조금씩 문제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냈던 서울 시청 앞의 텐트도 너무 약하고 조금씩 문제 있는 텐트들이었다. 구멍이 뚫려 비가 오면 완전히 침수되고는 했다. 그래서 헛소리 같은 소설은 안 쓰고 대신에 미안하고 고맙다는 편지를 쓴다. 언젠가 시청 광장 앞에 텐트를 치고 산 사람들이 있다는 걸 누가 기억이나 해 줄까 싶다. 그리고 다시 J와 연락이 닿는다면 소설책 값은 꼭 돌려 받고 싶다. 다른 책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내 돈으로 산 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책이었기 때문이다.

(2018)


이주연은 사회적 고립, 국경을 넘는 친밀감, 노동 불안정, 기술 발전, 산업 독성학과 몸 정치학 등을 포괄한 광범위한 리서치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분석적이면서도 시적인 논픽션 무빙 이미지를 연출한다.

Jooyeon Lee works with analytical yet poetic non-fiction moving image with expansive research and interviews to capture urban alienation, intimacy across borders, labour precarity, technological progress, industrial toxicology and body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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