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꿈의 자리

오늘의 마지막 상영:
3번 스크린 20시 00분 어셔링 시작
20시 18분 오프닝 크레딧 시작
23시 17분 상영 종료

23시 08분부터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씨유, 굿 나잇
영화는 어땠어요?

너무 길고 내내 목이 말랐어요. 입 속에 모래가 들어찬 것 같아

3번 스크린 안의 왕자는 젊다 아버지는 막강한 권력자이고 어머니는 신비한 요술을 부린다
왕자는 꿈을 꾼다
형광빛 파란 눈이 번쩍번쩍 빛나는 소녀가 읊조린다
내 고향은 아름답지
아름답고
아름답다

나는 소녀가 자신의 고향이 아름답다고 읊조리는 부분까지 영화를 보고는 조용히 문을 닫는다
매일 다른 관객들이 소녀의 읊조림을 듣는다
소녀의 고향은 아름답다고 한다
소녀는 매일 20시 20분에 이를 읊조린다
11시 35분에도
15시 55분에도
18시 20분에도
소녀의 고향은 수천 수만 번 아름답다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 읊조림을 듣는다
한 왕자의 개꿈이 하루에도 몇 번씩 전세계의 관객들에게 공유된다
(그러나 왕자가 꿈 속에서 보는 소녀의 고향은 솔직히 그렇게 예쁘지 않다. 관객들이 소녀의 고향으로 관광을 간다면 수분크림을 꼭 챙길 것이다)
나는 영화 뒷부분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개꿈의 자리에 초대 받지 못했다.

영화가 시작하고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스크린의 문을 열고 문제 없이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내가 확인할 때마다 스크린에는 배우의 얼굴 클로즈업 밖에 보이지 않는다.
왕자는 심각해 보인다.
왕자의 아버지도
왕자의 어머니도
다들 심각해 보이고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여자들의 포효 소리
사실 먼 곳에 여자들은 없다 왕자에게는 여자들의 포효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 소리는 관객들에게만 들린다 귀한 핏줄을 가진 왕자도 꿈 속의 신비한 소녀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 소리는 해져 가는 노스페이스 파카를 입은 다 떨어져 가는 가짜 속눈썹을 한 관객들에게만 들린다
영화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짜증나, 내일부터 월요일이라니, 궁시렁대고 남은 팝콘을 쓰레기통에 버릴 관객들에게만 들린다

왕자는 눈을 감고 귀한 얼굴을 찌푸린다
(이 때 왕자는 아주 잠시 여자들의 포효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만 같다.)
2시간 59분 동안 왕자는 사막을 걷는다
왕자는 어디론가 간다

23시 08분부터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씨유, 굿 나잇
영화는 어땠어요?

이건 쿠키 영상 없죠?

잘 모르지만 왕자는 모험을 떠날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신비한 소녀를 사랑하겠지 한 20년이 지난 뒤에 왕자와 소녀는 현실 세계의 대배우가 되어서 비밀 결혼도 할 것이다

23시 20분 나는 3번 스크린의 조명을 전부 켜고 바닥을 가득 채운 팝콘 찌꺼기를 청소기로 빨아들인다
팝콘 사막에 머문다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개꿈은 끝났지만 지금도 소녀는 자신의 고향이 아름답다고 읊조리고 있다.

(2021)


이주연은 사회적 고립, 국경을 넘는 친밀감, 노동 불안정, 기술 발전, 산업 독성학과 몸 정치학 등을 포괄한 광범위한 리서치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분석적이면서도 시적인 논픽션 무빙 이미지를 연출한다.

Jooyeon Lee works with analytical yet poetic non-fiction moving image with expansive research and interviews to capture urban alienation, intimacy across borders, labour precarity, technological progress, industrial toxicology and body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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