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야기

오랜만에 본가를 찾았다 벽에 남긴 낙서들 친구와의 편지들 병 안에 구겨 넣어 놓은 인형과 장난감들 손가락만한 테디 베어를 욱여 넣은 병은 내 어린 시절의 박제품 이 방은 뼈와 기형아를 모아 놓은 괴상한 박물관

그 때도 내 방은 북향이고 지금도 북향이다 나는 엄마가 운전을 관둔 줄 알았지 그런데 아빠가 관뒀다고? 귀가 먹어도 운전은 할 수 있어 다른 운전자가 미래로 나아가는 속도를 듣지 못할 뿐

참 이상하지 다들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 같아 내가 이렇게 말하자 남동생은 나에게 조용히 하라고 한다 아니 들어봐 우리가 어렸을 때 아래층에 노부부가 살았잖아 아들 부부랑 손자 둘 그리고 백수 미혼 아들도 같이 살았지 학교 갔다 와서 집에 아무도 없을 때 거실 바닥에 귀를 대어 보면

고함소리
병이 깨지는 소리 아이가 발작하며 놀라는 소리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까지

우리는 아무도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안 했어 백수 미혼 아들이 담배를 펴 대서 내 방 창문으로 담배 냄새가 매일 올라오는데도 북향으로 나 있는 방은 전통적으로 탕아의 방

한 번은 엄마가 그 집 아주머니를 엄청 칭찬했지 며느리가 부모도 없고 보육원 출신인데 시어머니를 엄마 엄마 하면서 잘 따른다고 그러고는 그 집에 우리 집에 남아 있던 동화책 전집을 갔다 줬어 엄마는 불행한 사람들한테 자꾸 헌 책을 줬어 그 아주머니는 동물이 아닌데도 자꾸
유기견을 입양한 집처럼 추켜세웠지

내 방은 북향이고 전통적으로 탕자의 방이다 그 새끼는 자기 방 안에선 유난히 조용했고

아직도 나는 생각하고 있다 방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의 베란다를 하나 하나 보면서
저 집들도 다 똑같은지

학교 갔다 와서 집에 아무도 없을 때
거실 바닥에 귀를 대어 보며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다들 이러고 사는구나

그걸 잊으면 나도 시어머니를 엄마 엄마 따르면서도
집 한구석에서 흐느끼는 여자가 될까봐
다들 세계를 잊어갈 때
나는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는 걸

(2019)


이주연은 사회적 고립, 국경을 넘는 친밀감, 노동 불안정, 기술 발전, 산업 독성학과 몸 정치학 등을 포괄한 광범위한 리서치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분석적이면서도 시적인 논픽션 무빙 이미지를 연출한다.

Jooyeon Lee works with analytical yet poetic non-fiction moving image with expansive research and interviews to capture urban alienation, intimacy across borders, labour precarity, technological progress, industrial toxicology and body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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