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

먼 길을 달려와 비를 마고 최루액을 맞고 물대포를 맞고 그리고 끌려갔다 온 여러분들이 눈물 겹도록 사랑스럽고 고맙습니다 한 달 동안 우리가 만들어낸 일들은 기적이었고 어제는 우리가 겪은 일들은 역사가 될 것입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아무도 이 절망의 기억을 넘을 수 없다고 돌아설 때 온몸으로 벽을 기어 오르는 담쟁이처럼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희망을 향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행정대집행이라는 법의 이름으로 우리 조합원들은 공장 밖으로 끌려나가 내동댕치쳐졌고 모이기만 하면 연행되었고 이 크레인에 대한 강제 침탈의 기도가 몇 차례나 시도되었습니다 그 피말리는 시간들을 견디게 했던 건 희망버스 여러분들이었습니다 특공대가 바로 앞에 85호 크레인을 수천명의 무장 경찰이 공장을 에워싸고 용역들에 둘러싸여 전기마저 끊어진 이 크레인이 저라고 왜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저라고 왜 불안하지 않았겠습니까 2003년 10월 17일 김주익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이 크레인에 올랐던 날 그날로부터 저는 이 85호 크레인을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한진 자본에 대한 분노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이 훨씬 더 컸습니다 여기 올라와서 너무나 절실하게 추위와 고립감과 단절감이 왜 밑에서는 129일이 되도록 그토록이나 몰랐을까 채 하루가 되지 않아 그토록 절박하던 그 외로움을 나는 왜 129일동안이나 외면했을까 그 외롭고 억장 무너지는 영혼들이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겁니다 그래야 저도 제대로 살 수가 있습니다 비바람과 지독한 바다안개 속에서도 이 크레인 주변을 떠나지 못하며 길바닥에서 우리 조합원들 조남호 회장에게 쓰레기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지만 제겐 너무나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들 아버지가 희망퇴직을 하면 아들은 살려주겠다 해서 아버지가 희망퇴직을 했는데 결국 아들마저 잘라 버리는 2003년 비정규직이었던 아버지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스스로 목숨을 끊고 아버지의 목숨 대신에 아들이 입사를 했는데 그 아들마저 잘렸습니다 우리를 먼저 지키기 위해 감시해 주셨던 신부님 수녀님들 밤낮없이 함께해 주시고 우리 목소리를 외신까지 보도되게 해 주신 여러분들 오늘도 맨 앞에 서신 백기완 선생님 문정현 신부님을 비롯한 여러 어르신들 현장에 같이 있었던 여러 의원님들 고맙고 그리고 죄송합니다 전국에서 내려온 희망버스 승객 여러분 여러분들이 계신데 제가 뭔들 못하겠습니까 희망버스는 모든 소외되고 억압 받는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희망이고 미래를 향한 힘찬 출발입니다. 저들이 폭력으로 막으려 하는 것도 바로 그 희망입니다. 정리해고로 고통 받은 쌍용차 유성기업 전국의 모든 노동자들 900만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장애인들 성적 소수자들 철거민들 학생들 제주 강정마을 그 모든 희망을 싣고 달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불의에 침묵하지 않음을 더 이상 부당한 권력에 굴종하지 않음을 신명나게 치열하게 화끈하게 보여줘야 합니다 빗길을 뚫고 전국에서 달려와 주신 여러분들 너무나 자랑스럽고 너무나 고맙습니다 2011년 7월 9일 역사는 이 날을 반드시 기억할 것입니다 물방울들이 모여 작은 희망의 꽃씨 하나가 어떻게 꽃과 세상이 되는지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저와 우리 조합원들을 그리워하셨던 너무나 그리워했던 여러들 우리는 결코 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끝까지 함께 투쟁

어젯밤 때문에 얼굴이 퉁퉁 부운 평온이 길거리에 울리는 목소리를 듣는 평온이 평온이의 그 평온한 얼굴

(2019)


이주연은 사회적 고립, 국경을 넘는 친밀감, 노동 불안정, 기술 발전, 산업 독성학과 몸 정치학 등을 포괄한 광범위한 리서치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분석적이면서도 시적인 논픽션 무빙 이미지를 연출한다.

Jooyeon Lee works with analytical yet poetic non-fiction moving image with expansive research and interviews to capture urban alienation, intimacy across borders, labour precarity, technological progress, industrial toxicology and body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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