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

우리는 약속했어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버디버디에 지역과 나이를 밝히지 않기로 너 뉴스 봤지? 수원역 노숙 소녀 살인 사건 있잖아 그 여자애가 버디버디로 만난 친구들하고 같이 지내다가 그렇게 되었다던데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 버디버디에 지금 있는 지역 같은 거 올리지 말자 나한테만 살짝 말해줘 나는 지금 부천역에 있어 19살이고 너는 어디에 있니 몇 살이니

어 나도 부천역 근처야 나는 대충 둘러대었고

수원역 노숙 소녀는 사실 노숙자가 아니었다지 자주 가출해 쉼터에서 생활하는 경우는 있어도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는 애는 아니었다고 어쨌든 우리는 모두 길바닥에서 살아가는 거야. 부천역 19살이라는 얼굴 모르는 친구는 괜스레 멋진 말을 하고

오늘은 편의점에서 잠

알바가 쫓아내면?
찜질방?

ㅇ 안 되면 그냥
밤샘

수원역 노숙 소녀 살인 사건 있잖아 그 여자애도 쉼터에서 지냈다고들 했거든 그런데 나도 저번에 쉼터에 갔는데 개인 정보를 적게 한단 말이야. 하룻밤 자고 있어났는데 부모님이 데리러 오신 거 있지 거기에 집 주소를 썼거든

그담부턴 가명으로 마구 써서 냈는데
쉼터에서 나가라고 함

난 저번에 가출했을때
인터넷에서 만난
아저씨한테 재워달라 그랬는데

헐 미친

근데 별일없었음

헐…

버디버디에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밝히지 말자던 얼굴 모르는 친구는 부천역에 있었고 노숙자가 아니었던 노숙 소녀는 수원역 근처 공고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나는 신촌 레즈공원 화장실에 문을 잠그고 눈을 붙였다

야 씨발년아 누군지는 몰라도 빨리 나와
똥마려우니까

돈이 떨어졌을 때 생각난 건 기타를 치겠다고 실용음악고로 진학했었던 중학교 시절 동아리 친구

5만원만 빌려달라는 전화는 철거 직전의 공중전화기에서 이루어지고 야 너 지금 어디야. 너희 어머니가 전화하셨어. 어머니가 엄청 우시던데. 기정이는 중학교 시절 같이 밴드부에서 기타를 치던 친구. 우리 중에서 제일 빨리 담배를 피웠고 전교 등수는 400등 밑으로 내려가곤 했다

5만원보다 더 많이 빌려줄게. 너 지금 어디야. 내가 너 돈 주러 갈게. 우리 동아리 할 때 엄마가 너랑 놀지 말라고 했지 집 근처에도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어. 네가 나에게서 빌렸던 음악 앨범을 돌려주러 우리 집에 왔을 때 엄청 혼났거든 그래도 화 안 나니? 우리 엄마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니? 너야말로 이상한 소리 한다. 그런 걸로 누가 화를 내. 걱정 말고 내가 너희 어머니한테 전화해 줄게. 오토바이를 타고 온 기정이는 길바닥의 수호천사. 나는 그 날 이후로 기정이를 만날 수 없었다. 우리 엄마가 기정이에게 자신의 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할 거라고 개구라를 쳤기 때문에

(2019)


이주연은 사회적 고립, 국경을 넘는 친밀감, 노동 불안정, 기술 발전, 산업 독성학과 몸 정치학 등을 포괄한 광범위한 리서치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분석적이면서도 시적인 논픽션 무빙 이미지를 연출한다.

Jooyeon Lee works with analytical yet poetic non-fiction moving image with expansive research and interviews to capture urban alienation, intimacy across borders, labour precarity, technological progress, industrial toxicology and body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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