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한

내가 미국 땅에 온 건 열 셋인가 열 넷일 때 어머니를 따라 왔거든 자한기르는 검은 곱슬머리가 잘 어울리고 조금은 통통한 멋있는 청년 나이는 나와 같은 스물 네 살 갓 대학을 졸업하고 어찌 된 일인지 서울에 온 외국인 젊은이 어머니는 아버지를 어디에서 만났는지 모르겠어 아마 대학에서 만났을 것 같은데 옛날 사진을 보면 어머니는 금발에 키가 크고 아버지는 검은 곱슬머리에 통통해. 우리는 도서관에서 만났다고 하자 아니 아니 내가 한국어를 아직 못 하니까 도서관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는 어색하겠군 그럼 이케아에서 만났다고 하자 내가 가구를 사기 위해 광명 이케아를 들렀는데 너를 만난 거야.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내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 있지 또 친척이 엄청 많아 만난 지 삼 일 만에 가족 이야기를 하는 자한기르 매일 친척들과 모여서 차를 마시고 시를 읊고 물담배를 피는, 테헤란의 대가족에 껴 있는 금발의 키 큰 미국인 여성. 이 이야기는 내가 자한기르를 도서관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보다도 더 어색해 보일 것이다.

혹시… 너희 어머니도 그 스카프 같은 걸 둘러 매셨니? 차도르를 말하는 것이지? 집에서는 쓰지 않지만 외출할 때는 쓰고 나갔지 금발을 차도르 안에 전부 다 집어 넣은 미국인 여성이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쇼핑몰에 가 멍하니 앉아 있다 어머니가 아들들을 쇼핑몰에 데려온 것인지 아들들이 어머니를 쇼핑몰에 데려온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쩔 수 없어. 여름엔 밖이 너무 덥잖아. 어머니가 이란에서 잘 생활하셨니? 자한기르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란에서는 시를 읽고 쓰는 걸 학교에서 많이 가르친단다 루미라는 시인을 아니? 사디 시라치는? 아마 천일야화는 이란의 시가 아닐 것이다 이란에서는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이 무조건 따로 수업을 듣거든 남자중학교를 다니다가 갑자기 미국으로 건너가 살게 되어서 얼마나 어색했는지 몰라 여학생들한테 눈도 못 마주치고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어색했다니까. 자한기르는 어색하게 자기가 학교를 다닐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미국에 와서 중학교에 다니면서 알게 된 건데 아버지한테 딸이 하나 더 있었나봐 둘 다 이란에 남아 있지. 자한기르는 자기 집으로 향하는 길에 나에게 알려준다 너희 어머니는? 어머니는 미국으로 건너 간 뒤에는 이란을 다시 방문한 적이 없어 아마 다시는 방문하지 못할 거야

두 분이서 결혼한 직후에 페르세폴리스에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이 이란에 남아 있어 그 사진을 보면 다른 페르시아인 관광객들이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고 있지 자한기르는 자기 집의 문을 열어 나를 안에 들여 보내 주며 말했다 금발을 모래 바람에 휘날리며 불편한 표정으로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는 젊은 미국인 여성 그것도 모르고 속없이 웃고 있는 검은 곱슬머리의 이란인 남성 너는 이란인이니? 자한기르는 아주 옛날 인도 왕의 이름. 그냥 자한이라고 불러도 돼 나는 페르시아인 그리고 미국인이지 남동생은 지금 대학에 다니지 어머니는 고향인 오하이오에 잘 계실 거야 자신의 어머니랑 같이 살고 있어. 나는 지금은 취직해서 서울에 와 있지만 언젠가는 오하이오가 아니라 테헤란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해 도대체 왜? 나는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쩌다 보니 미국에 가서 학교를 끝마치고 대학에 가게 됐어 어느 날 어머니가 처음 보는 자동차를 운전해 와서 나와 내 남동생에게 타라고 했거든. 그 전까지는 어머니가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어.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차를 타고 어머니에게 어디 가는 건가요? 하고 물어봤지만 어머니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지. 그대로 도착한 곳은 호메이니 국제 공항. 가장 빨리 미국으로 떠나는 항공권을 어머니는 세 장 샀고

그 항공권으로 도착한 곳은 아마 디트로이트였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국 땅에 간 순간이었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국 땅에 갔는데 거기는 바로 디트로이트.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경찰들이 어머니를 둘러쌌어. 너무 오랜만에 미국에 돌아와서 아마 테러리스트인줄 알았을거야. 자기 아들이라고 하는 남자애들도 둘이나 데리고 왔으니까. 우리 모자는 공항에 며칠 갇혀서 조사를 받았고. 결국 풀려나 자유의 몸으로 디트로이트 시내로 나왔을 때 우리 셋은 빈털털이. 심지어 아들이라는 남자애들은 영어를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고향인 오하이오에 외할머니가 아직 살아 계셨어 외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다 포기하고 이란으로 돌아갔을지도 몰라. 자한은 내 두 팔을 붙잡고 위에 앉아서 이야기한다 내가 콘돔을 껴 달라고 했잖아 벽에 붙여져 있는 금발 여성 셋의 사진 절 앞에서 찍은 사진 속 관광객의 얼굴들

어머니는 고향인 오하이오에 잘 계서 외할머니랑 같이 살고 있어 아마 다시는 이란을 방문하지 못할 거야. 나랑 내 남동생은 가끔씩 친척을 만나서 테헤란에 가기도 하는데 그러면 차도 마시고 시도 읊고 물담배를 피다가 돌아와. 언젠가는 오하이오가 아니라 테헤란에 돌아가려고 해. 내가 콘돔을 껴 달라고 했잖아 자한은 내 두 팔을 붙잡고 위에 앉아서 이야기한다 나는 분명 콘돔을 껴 달라고 했는데 그만 하라고 했는데.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2019)


이주연은 사회적 고립, 국경을 넘는 친밀감, 노동 불안정, 기술 발전, 산업 독성학과 몸 정치학 등을 포괄한 광범위한 리서치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분석적이면서도 시적인 논픽션 무빙 이미지를 연출한다.

Jooyeon Lee works with analytical yet poetic non-fiction moving image with expansive research and interviews to capture urban alienation, intimacy across borders, labour precarity, technological progress, industrial toxicology and body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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