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풀과 금가루

내가 재미있는 거 보여 줄까? 미나미는 본가에서 온 귤을 까 먹다가 나에게 제안했다 나는 방을 빼고 서울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우리는 함께 바다를 보러 갔다 온 뒤였다 해변에선 개수구 냄새가 났다 인공 해변이라서 그래, 해변에 같이 간 마오가 나에게 설명해 주었고

미나미가 장롱 안에서 종이상자를 꺼내 식탁에 내용물을 쏟자, 온 집 안에 울리는 삐약거리는 소리 통통 튀는 고무 인형 한 눈만 그려진 다루마 화장품 케이스 안에 담겨 있는 슬라임 꼬리가 뜯어진 피카츄

이건 저번에 같이 일하는 동료가 오사카에 놀러 갔다가 사 온 것, 고무로 만든 물개의 얼굴은 손톱으로 눌러 대서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이건 해외여행 갔다 온 알바처 사장님이 선물로 사다준 것, 커다란 머리를 흔들거리는 여자 아이 인형은 뇌가 울릴 때마다 꺅꺅거렸다 이건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놀이공원 갔다가 사온 것, 우리 동생 이번에 초등학교 들어가 투명한 공 안에는 방울과 글리터와 작은 너구리가 들어가 있었고 새로 지은 초등학교라서 시설도 되게 좋대, 이건 유투브에서 재료 보고 만든 것 이거 키트도 인터넷에서 판다 미나미는 작은 케이스를 열고는 식탁에 구토 자국처럼 퍼지는 녹색 물체를 꾹꾹 눌렀다

녹색 물풀을 손으로 모아 산을 만들면 허술한 산은 금방 제자리로 퍼진다 서울로 돌아가도 계속 연락은 할 거지? 묻어 나온 금가루가 미나미의 손톱 밑으로 차고 올라가고, 마오와 미나미는 사이 좋게 전문대에서 미용을 전공하고 같이 살고 있다 미나미는 녹색 물귀신을 손톱으로 꾹꾹 눌러 상처 자국을 만들어내고

저번에 본가에 내려 갔을 때, 아빠가 앨범 하나를 꺼내는 거야 거기에 아빠가 엄마랑 연애할 때 찍었던 사진이랑 당시 있었던 일을 하나씩 써 놨던 거 있지 이 날은 처음으로 같이 햄버거를 먹었다, 뭐 이런 거, 미나미는 녹색 물곰을 뭉치며 오키나와에 있는 가족 이야기를 한다 앨범 속에 있는 어머니와, 놀이공원에 가 준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다 그래도 난 지금 엄마랑 지금 동생이 좋아

녹색 물체는 말없이 웃는 얼굴이 되었다가 우는 얼굴이 되었다가 땀이 나는 무표정으로 변한다 미나미는 녹색 물체를 엄지손가락 마디만큼 떼어 작은 하트 뭉치를 만들기 시작한다 수많은 사랑의 기호들은 식탁 위를 떠다니기 시작하고 식탁 한 켠에 모여 있는 백 엔짜리 매니큐어들

서울에 돌아가도 언젠가는 다시 놀러 와, 식탁은 사랑으로 가득 찼고 나는 시중에서 판매 중인 액체 장난감에서 발암 물질이 나왔다는 뉴스를 이야기해 줘야 하나 순간 고민이 들었다 미나미의 어머니는 미나미를 임신했을 때 암이 발병해 아이를 낳은 뒤 세상을 떴고, 그 식탁에는 백 엔짜리 매니큐어의 냄새가 타는 듯 퍼지고 있었다

(2019)


이주연은 사회적 고립, 국경을 넘는 친밀감, 노동 불안정, 기술 발전, 산업 독성학과 몸 정치학 등을 포괄한 광범위한 리서치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분석적이면서도 시적인 논픽션 무빙 이미지를 연출한다.

Jooyeon Lee works with analytical yet poetic non-fiction moving image with expansive research and interviews to capture urban alienation, intimacy across borders, labour precarity, technological progress, industrial toxicology and body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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