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만원

1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젊은 부부 둘이 가게를 찾았다. 백화점 1층에 입점한 브랜드였다. 그 부부는 피곤한 얼굴로 점원을 불렀다.

저기, 15만원으로 살 수 있는 것을 보여주세요.

조금 이상한 요구라고 점원은 생각했다. 젊은 부부 중 아내는 아주 피곤하고 메마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이 하나도 붙어 있지 않아 무서운 인상이었다. 반면에 남편은 다소 한량 같고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입고 있는 양복이 몸에 맞지 않았다. 필시 누군가에게 빌린 양복이었다. 입사한 지 딱 1년이 되는 젊은 점원은 그리 영민하지도, 둔하지도 않은 성격이었다. 그러나 그 양복이 빌린 양복이며, 이 부부는 본래 이런 곳에 올 일이 없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무엇이 필요하실까요? 15만원에 맞는 상품은 많습니다. 점원은 위아래로 흘겨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점원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아무리 15만원이 큰 돈이라지만 여기는 백화점 1층 자리였고, 정장이나 원피스, 핸드백 같이 명품 가게에서 살 법한 물건들을 사기엔 15만원은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기껏해야 괜찮은 넥타이나, 여성 팬츠 정도나 살 수 있을까? 그 두 부부가 각자 분의 넥타이와 여성 팬츠를 살 수도 없는 가격대였다. 어느 분 것을 보여드릴까요? 점원은 부부를 번갈아 보았다.

글쎄요. 누구 것을 사야 할 지… 아내는 답했다. 울다 온 사람처럼 빨간 아내의 눈을 보며, 점원은 이상한 부부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점원은 뒤로 돌아 수많은 물건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오른편에 있는 넥타이를 가리켰다. 저희 가게에서 제일 잘 나갑니다. 순간 점원은 쉽사리 넥타이를 가리킨 것을 곧장 후회했다. 남편의 양복은 아무리 봐도 빌린 양복인데, 넥타이를 사도 걸맞게 입을 일이 없을 거였다. 하나 보여드릴까요? 점원은 억지로 웃으며 물으니 아내가 대신 답했다. 하나 보여주세요. 아내의 말에 점원은 붉은색 넥타이를 하나 꺼냈다. 자잘하게 송아지가 그려져 있었다. 이번 해는 소띠 해라서 특별히 나온 거예요. 아내는 붉은 넥타이를 손에 쥐고 실크를 어루만졌다.

설날 선물로 남편 분께 어떠세요? 아니면 부모님에게? 순간 아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붉은색 넥타이를 탁 소리나게 카운터에 놓았다. 점원은 딱히 뭐라고 해야 할지 막막했다.

남편이 우물쭈물하며 대신 말했다. 저기, 여성복이 낫겠어요. 15만원으로 그냥 스웨터라도 살 수 있나요? 점원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스웨터는 시즌이 지나서 예쁜 건 별로 없어요. 얇은 옷이 좋지 않을까요? 15만원으로는 옷감이 많이 드는 스웨터를 살 수는 없었다. 점원은 떠오르는 대로 대충 둘러댔다. 이제 곧 봄인데 스커트는 어떠세요? 점원은 부부를 가게의 다른 쪽으로 이끌며, 분홍색 꽃이 화려하게 그려진 하얀 스커트를 보여 주었다. 요새는 30대, 40대나 결혼하신 분들도 화려한 걸 많이 입으시거든요. 폴리라서 가볍고요. 한 번 입어보시겠어요? 점원은 권했다.

예쁘네요. 아내는 혼이 빠진 얼굴이었다. 옷을 제대로 보고 있지도 않았다. 패턴이 예쁘죠? 이번 신상품이거든요. 이 패턴으로 자켓도 나오고 있고, 팬츠도 나오고 있어요. 세트로 사 입으셔도 되어요. 점원은 자기가 또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점원에게서 스커트를 건네 받은 남편은 침울한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가 스커트를 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글쎄요. 넥타이가 좋지 않을까… 점원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 있으세요? 이 패턴으로 아동복도 나오고 있어요. 남편은 솔깃하며 점원에게 다시 물었다. 이런 가게에서… 아동복도 파나요?

그럼요. 어머니들이 오셔서 커플룩으로도 입히세요. 요새 커플룩이라는 게 인기라고 하던데, 뉴스에서 보셨나요? 점원은 더 이상의 민망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술술 대답했다.

혹시 원피스 있나요? 원피스로 보여 주세요. 남편은 점원에게 부탁했다.

점원은 사이즈를 물어 본 뒤, 곧장 똑같은 옷감으로 만들어진 여아 원피스를 들고 왔다. 아까 전의 스커트처럼 플리츠 처리가 되어 있었는데, 속치마 덕분에 치마가 볼록하게 부풀어 있었다. 상체의 옷판 부분은 단단하게 하이웨이스트로 고정되어 있었고, 안에 무엇을 받쳐 입느냐에 따라 그 모양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디자인이었다. 원피스 아래는 레이스와 녹색 실크 리본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어깨에 멜빵이 있어서 초등학생이 될 때까지 입을 수 있어요. 여자아이들은 초등학생이 되면 원피스를 입지 않으려 한다는 걸 점원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부부는 곧장 그 원피스를 사 갔다. 14만 8천원이었다.

쇼핑백을 들고 백화점을 나가는 부부를 보면서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점원은 생각했다. 왜 하필 15만원이었고, 왜 아동복을 사 간 것일지 궁금했다.

2

문선희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을 별로 믿는 유형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학에 가는 걸 말리는 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고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갔고, 가족에 돈을 보내는 대신 혼자서 은행에 계좌를 만들었다. 문선희는 사람 대신 숫자를 믿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수학과 학회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했는데, 그 남자 또한 자기처럼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입학했으며,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것 때문에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시부모 봉양을 안 해도 되겠지. 결혼 생활 내내 부부는 시부모 봉양 걱정 없이 둘이서 오붓하게 가난한 부부로 남을 수 있었다.

문선희가 대학에 가서 혼자 만든 계좌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큰 액수를 넘기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학원에서 조교로 일했는데, 학생들에게 유난히 인기가 좋았기 때문에 그대로 그 학원에 취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산의 한 대형 입시 학원에서 수학을 제일 잘 가르치던 문선희는 그 돈을 모아서 자기 집을 살 생각이었다. 남편은 서울로 일하러 가 꾸준히 돈을 부쳤다. 언니가 아이들을 돌봐 주었기 때문에 자기 일도 계속하면서 서울에 집을 살 꿈을 계속 꿀 수 있었다. 문선희는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은 아직도 갓난애였다.

그러나 문선희는 그 통장을 자신의 아버지 문준평의 장례식 때문에 깨게 되었다. 1997년이 막 시작하자마자였다.

문준평은 늘그막에 막내딸인 문선희를 하나 더 보았는데, 그 위로 이미 딸이 하나, 아들이 둘 있었다. 막내딸에 별로 신경을 쓸 겨를도 없이 문준평은 이미 늙고 술독에 빠져 있었다. 문선희의 언니와 오빠들은 각자 미군 부대의 타이피스트, 용접공, 순경이 되어 차례차례 집을 떠났다. 문선희는 유난히도 사람을 믿지 않았고, 또 자기 아버지의 말은 더욱 더 믿지 않았다. 문준평은 항상 비슷한 말을 반복하며, 혼자 남은 문선희를 이유 없이 매타작하곤 했기 때문이다.

암짝에도 쓸모 없는 가스나. 그 지랄 해도 아무도 안 알아준다 아이가.

문준평은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마을의 노인들을 차에 태우고 다 같이 삼일장에 놀러 갔다. 막걸리를 마시며 최근에 태어난 외손자 이야기를 하던 문준평은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도저히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채로 운전을 해 집에 돌아오던 문준평은 그대로 고속도로에서 삼중 추돌 사고를 내 그대로 즉사했다. 그 차에 타고 있던 노인 둘도 같이 떠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선희는 그 사고의 피해 보상액을 마련하기 위해 통장을 깰 수 밖에 없었다. 보상금과 장례식, 각종 잡비를 문선희가 지출해야만 했다. 미군 부대 타이피스트가 되었던 언니나, 용접공과 순경이 된 오빠들은 사람을 너무 믿었기 때문에 통장에 돈을 많이 저축하지 않았고, 대신에 시골에 남은 부모님에게 조금씩 자주 보내 왔었다. 그 돈으로 문선희는 고등학교까지 시골에서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으나, 문선희가 학교를 졸업하는 데 들어간 돈보다 더 많은 돈이 문준평의 술값으로 들어갔다. 장례식에는 문준평과 비슷하게 얼굴이 벌건 노인들이 와서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시다 갔는데, 수금된 부조금을 다 정산하고 나니 남는 것은 15만원이었다.

문선희와 그 남편은 그 통장이 사라졌다는 것에 화를 낼 기력도 없었다. 남는 돈으로 새 옷이나 사 입을까. 말을 꺼낸 건 백화점 1층에서 아동복도 판다는 것도 모르는 남편이었다.

3

문준평은 젊은 시절 거제도의 포로 수용소에 갇힌 적이 있었다. 문준평은 군인이 아니었고, 그저 마산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였다. 그런데 어렸을 때 형과 함께 일본에서 지낸 적이 있다는 것 때문에 빨갱이로 몰리게 되었다. 일본에서 일을 한 것이랑 빨갱이인 것이 무엇이 연결고리가 있는지는 잘 몰랐지만, 문준평은 순순히 포로 수용소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우리 형님이 일본에서 이상한 책 읽음서, 학상들이랑, 뭐시당가, 작당을 했어도 지는 아닌기라.

문준평은 포로 수용소에서 돌아오고 나서 돌이킬 수 없는 주정뱅이가 되었다. 그 마을에는 문준평처럼 억울하게 수용소로 끌려간 젊은이들이 몇 있었는데, 절대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는 반면, 문준평처럼 사지가 붙어서 멀쩡히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가족과 아내들은 그들이 온 몸 멀쩡하게 돌아온 것을 축복했지만, 실은 아무도 멀쩡하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숲 속으로 사라지거나, 하루 건너 아내를 패는 사람이 속속들이 나왔다. 문준평은 어린 학생들만 보면 괜히 화가 났다. 자기가 일본에 형님을 따라 일본에 간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린 학생들의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함에 울분이 솟아 올랐다.

문준평은 백화점의 젊은 점원에게도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점원은 영민하지도, 둔하지도 않은, 오히려 말실수가 좀 많고 손님들을 다 귀찮게 여기는 유형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설령 문준평이 관짝에서 나와서 외손녀 원피스를 사러 왔다고 해도 그 모든 이야기들을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점원은 그저 가게 카운터에 기대 서서 쇼핑백을 들고 가는, 검은 정장을 입은 젊은 부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양복이 몸에 안 맞아도 잘생겼던데. 점원은 속으로 그 남편을 평했다. 그 해 가을에 나라가 무너져서 그 남편이 단칸방에서 술을 마시며 화를 내는 사람이 되리라는 것도 모르면서 말이다.

(2018)


이주연은 사회적 고립, 국경을 넘는 친밀감, 노동 불안정, 기술 발전, 산업 독성학과 몸 정치학 등을 포괄한 광범위한 리서치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분석적이면서도 시적인 논픽션 무빙 이미지를 연출한다.

Jooyeon Lee works with analytical yet poetic non-fiction moving image with expansive research and interviews to capture urban alienation, intimacy across borders, labour precarity, technological progress, industrial toxicology and body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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